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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들

여행의 괴로움

토이판다 2023. 7. 12. 11:01

진짜 여행

 

보통 여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감정들이란 행복, 즐거움, 일상을 벗어나는 짜릿함 같은 것들이다. 여행과 함께 괴로움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여행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여행에서의 모든 순간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 기차가 20시간 넘게 연착되거나 핸드폰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꼭 가고 싶었던 곳에 갔는데 예상과 너무 다를 때도 있다. 누군가에게 속아 바가지를 쓸 수도 있고, 시위로 국경이 닫혀 몇시간이고 버스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괴로움이 좋다. 매일 똑같은 곳으로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일상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 그리고 그런 고통에서 얻어지는 희열. 서울에서는 어딜 가도 예약하고 가지만 여행갈 때는 예약도 잘 하지 않는다. 비행기와 첫날 숙소 정도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상황에 맞춰 흘러가는대로 여행하는 게 좋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하나씩 찾아가지만 못본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호텔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더 좋다.

 

미리 모든 것을 계획하지 않고 현지에서 그때그때 갈 곳을 정하기 때문에, 일정의 많은 부분을 가능한 비워 두려고 한다. 그러면 빈 여백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길을 헤매다 잘못 들어간 아름다운 골목길,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 길거리에 앉아 사람들과 대화하는 순간에서 반짝이는 낭만을 찾을 수 있다. 여행 후 더 기억에 남는 것은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골목길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에게 크리켓을 배우던 순간이다. 마추픽추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아구아 깔리엔떼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마신 이상한 음료수 맛이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은 마추픽추에서 찍은...

 

이렇게 여행을 가면 늘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일상을 떠나 여행을 가는 게 좋고, 여행하듯 살고 싶다. 일상을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로 꽉 채우고 싶다. 자려고 누웠을 때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고 싶다.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히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