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만 더, 한 발만 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일일 회고

#200406 #월간회고 #연간회고

토이판다 2020. 4. 3. 13:37

MKF Incheon, Korea 2015

 

 입사 5년만에 번아웃이 왔다. 지난 한달간 그 어둠을 뚫고 나가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왔다.

 

 번아웃을 스스로 인정하고 행동하기로 결정한 것은 딱 1달 전인 3월 5일이다. 돌이켜 보면 2019년 이맘때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2019년 말에 절정에 달했고, 충분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관성 때문에 극복할 한 걸음을 떼지 못했다.

 

 내가 느낀 번아웃 증상은 다음과 같다.

무기력함, 피로감, 남 탓, 분노 그리고 두려움.

 

 주요 원인은 강박이다.

탁월함에 대한 강박과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하는 것.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효율이라는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행동한 것.

재충전 없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새로운 시도, 높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여행을 자주 가지 않은 것.

 

 매일 1시간 1분을 모두 쪼개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고, 강연을 듣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모든 것은 '성공'에 도움이 되느냐의 기준에 따라 할 지 말 지가 정해졌다. 오직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하던 모든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공부를 하거나 개발을 하는 것도 꽤 많은 보람과 즐거움을 준다. 애초에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점점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점점 강박이 생기면서 그 균형이 너무 많이 무너진 것 같다. 지난 1-2년 사이에는 요리, 기타 연주, 소설 읽기, 글쓰기 또는 산책 같이 순수한 행복을 주는 일들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2019년에 120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 중 문학은 10권도 되지 않는다. 요리하는 시간이 아까워 포장된 음식만 먹었다. 생존을 위한 운동과 영양소 섭취 외의 모든 시간을 '성공을 위한 노력'에 쏟으려 했다.

 


 

 소설 「모모」를 보면 사람들이 회색 신사들의 꼭두각시가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런 느낌이었다.

 

 "... 아무튼 이들의 존재가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시간 저축 은행의 고객들은 많아지며, 그에 따라 대도시에서는 웬일인지 무표정하고 신경질적이며 오로지 알뜰한 것의 가치만을 따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축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꿈을 죄악시하며 정적을 혐오하여 항상 소란을 떨며 미쳐 날뛰게 된다. 주인공 모모와 그 친구들도 이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점점 시간이 부족해 모모를 찾아올 만큼의 여유를 부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

 


 

 내가 인생을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가는대로 내가 끌려가는 느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어떤 시점에서 이것을 극복하기로 결심했고, 몇몇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했다. 먼저 출근해서 일하는 시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가 하고싶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처음에 이건 번아웃 그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의 상태를 인지하고 객관화하면서 극복하기 위해 조금씩 노력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아무 생각 없이 연달아 영화를 보고 나를 위한 요리 하기.

 그 중에서도 특히 요리에 집중하면서 많이 좋아졌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양파의 색깔에 집중하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는 얼마나 남았는지 등을 생각하다 보니 많아 봐야 3일 앞까지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더 체계적으로 요리를 배워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요리를 해주는 것.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말이 안된다. 어릴 때부터 아일랜드식 주방을 가지는 게 꿈이었을 만큼 요리하는걸 좋아했는데 그 주방을 만들 돈을 벌기 위해 지금 요리를 하지 않는다니.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 점점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만들었고, 결국 그것에 잠식당했는지 모른다.

 


 

 영화 「타이타닉」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Well, yes, ma'am, I do... I mean, I got everything I need right here with me. I got air in my lungs, a few blank sheets of paper. I mean, I love waking up in the morning not knowing what's gonna happen or, who I'm gonna meet, where I'm gonna wind up. Just the other night I was sleeping under a bridge and now here I am on the grandest ship in the world having champagne with you fine people. I figure life's a gift and I don't intend on wasting it. You don't know what hand you're gonna get dealt next. You learn to take life as it comes at you... to make each day count." ― Jack Dawson

 


 

 이제 딱 한 달 정도 되었다. 처음엔 어떻게 해도 이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일일 회고를 그만두는 시점에서는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제 반대편 입구가 보인다. 슬슬 다시 시작하고싶다. 주변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더 건강하게 생각하고 더 바르게 행동해야겠다.

 

 일, 돈, 사랑과 삶 그 어떤 것에도 파괴적으로 집착하지 않을 것. 나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일이든 탁월한 수준으로 완수해낼 것.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원칙을 세우고 꾸준히 실천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 것. 오늘 죽음이 찾아올 수 있음을 알고 언제나 타인을 따뜻하게 대할 것.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을 것.

 

 지난 한달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월간 회고가 아니라 5년치 연간 회고가 된 것 같다. 그동안 이룬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다. 삶은 비워야 채운다는 것을 이번에 또 깨닫는다. 오래 전 썼던 글 중 "하얀 소금이 너무 욕심나 두 손 가득 꽉 쥐고 정신없이 달렸는데, 나중에 보니 소금은 없고 찝찝한 액체 뿐이었다." 라는 식의 문장이 있다. 해가 바뀔 때 썼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내 손 안의 소금은 어떤 상태인가.

 

지금 시점에서 내 삶의 목표는 아래와 같다.

 "기술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작은 생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바꾼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너는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작은 영혼일 뿐이다." ― 에픽테토스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 가리라

   한 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 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은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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